송석준 자유한국당 의원 국회뉴스ON 인터뷰
유교적 가풍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려운 유년시절 보내
행정고시 합격해 25년간 공직생활…굵직한 국가프로젝트 맡아
부처 간, 시만단체와의 대립 등 다양항 갈등관계 조정 경험 풍부

그는 “제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님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버님은 제 정신적 지주”라고 했다. 선친은 독실한 유교집안의 9대 종손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에서 시조묘(始祖廟) 사진과 효자표창을 모실 만큼 유교문화를 몸소 배우며 자랐다. 중학생 때 선친이 돌아가시고 농사를 직접 지을 만큼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독학으로 공부해 ‘관료사회의 꽃’인 재경직 행정고시에 합격해 25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됐다.

송석준(54·경기 이천·초선) 자유한국당 의원은 그 누구보다도 고향에 애정이 깊다. 연어가 산란기에 돌아와 알을 낳듯이 고향은 자신의 뿌리이자 앞으로 자신의 모든 걸 바쳐야할 대상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국회의원이 돼서 고향인 경기 이천시가 ‘통일 한국의 중심도시’가 되도록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다. 그 바탕에는 선친의 가르침과 나눔의 정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가 자리잡고 있다. 송 의원의 인생역정을 국회뉴스ON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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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준 의원 가족사진. (왼쪽부터)목마를 타고 있는 조카와 매형, 송석준 의원, 여동생과 남동생(사진=의원실 제공)

◆가난했던 유년시절,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다

송 의원은 ‘콩 한 쪽도 나눠먹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밥을 먹어도 먹다만 듯한 느낌에 배고플 때가 많았다. 선친은 먹을 것이 생기면 늘 이웃과 나눴다. 콩 한 쪽도 온 식구가 함께 먹어야 한다며 정말로 직접 콩을 쪼개 나눠주기도 했다고.

“요만한 떡이 생기면 우리 7남매 먹기도 부족한데 꼭 반을 잘라서 (이웃)어른들에게 나눠드렸어요. 집이 두 칸이었는데 한 칸은 집 없는 사람들한테 공짜로 빌려줬습니다. 한 칸에 7남매가 몰려 사는데 그나마도 저녁에 행상들 오갈 데 없으면 아버지가 데리고 오세요. 항상 단칸방 아랫목에 재워드리고 우리 7남매는 밀려서 칼잠을 자야 해요. 그래서 저는 (어린 마음에)속이 상했죠.”

중학교 1학년 때 선친이 돌아가신 뒤로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다. 직업학교를 나와 생업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든 큰형의 뒷바라지로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이조차도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큰형이 군 입대를 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가족 생계를 책임지려 했지만 ‘대학생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유년시절은 송 의원을 ‘악바리’로 살게 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생겼고, 크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예의와 신의, 우애를 최우선 덕목으로 삼게 한 것은 선친이 물려준 훌륭한 유산이었지만 배고픔은 어린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갖게 했다.

“제가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에 갈 수 없는 이 형편이 너무 야속한 거예요. 아버님은 덕이 많으신데 좀 더 현실에 충실하셔서 더 열심히 돈도 벌고, 더 열심히 살림도 키울 필요도 있으실 텐데 과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할을 다하셨는가 하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기본적인 덕성(德性)에 더해 세상을 좀 넉넉하게,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 아버님을 능가하고 싶다는 게 저의 인생목표였죠.”

중학생 시절 모습. 그는 하교 후 농사를 지어야 했다.(사진=의원실 제공)

◆대학시절 방황하다가 행시 통해 ‘천직’인 공직의 길로

송 의원은 83학번으로 대학에 진학한 뒤 오랜 방황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눈에 밟혔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게 대학시절이었던 거 같아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님 일찍 여의고 농사도 지어보고 소위 학생운동권에서 말하는 농민혁명·노동자혁명을 피부로 느끼고 절감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거든요. 학생운동이 극성일 때 ‘이 사회를 뒤집어봐야겠다’는 입장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와 가족들 생각에 마음껏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송 의원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도 함께 다닌 친구가 “너는 경제적 기반도 없고, 네가 학생운동을 주동하는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허송세월 하느니 같이 고시공부나 하자”고 권유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 당시 행정고시 재경직이 상당히 인기가 좋았습니다. 80년대 초반에는 사법고시보다 더 했죠. 경제관료가 되는 관문인 재경직 행정고시는 ‘고시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고도성장하던 시절이니까 경제관료가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당시 부동산시장이 급성장하던 시절이니까 재미가 있었습니다. 뭘 하나 하면 성과물이 나타나니까요.”

송 의원은 1991년 건설부(1994년 교통부와 건설교통부로 통합) 사무관으로 시작해 2015년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25년간 국토교통부에서 근무를 했다. 그는 “공직생활에 굉장히 자부심이 크다”고 할 만큼 공공을 위한 업무가 천직이었다. 그는 공직에 근무하며 분당·중동·산본 등 5개 신도시 계획, 사회간접자본(SOC) 건설과 같은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새만금 마스터플랜’을 꼽았다. 그는 국무총리실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만금 프로젝트를 맡았다.

“당시 새만금 프로젝트는 5개 중앙부처, 7개 기관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타협이 안 돼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새만금 업무가 완전히 꽉 막혀서 진도가 안 나가고 있는 겁니다. 왜 해야 되는지 당위성에 대한 것을, 스토리텔링을 제시하라고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었어요. 제가 투입돼 1년 근무하면서 마스터플랜을 완성하고, 스토리텔링을 완성하고 꽉 막혀있는 새만금 프로젝트에 상당한 진전을 이뤄냈죠. (잘 처리했다는)상당한 자부심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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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준 의원이 의원회관에서 국회뉴스ON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사진=김진원 촬영관)

◆오랜 공직생활 통해 갈등과제 해결 노하우 배워

송 의원은 오랜 공직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노하우를 몸소 체득했다. 새만금 프로젝트에서는 부처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면, 시화호 북측 간석지 개발사업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와의 대립을 조정한 사례다. 당시 시민단체들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15년간 사업이 표류해 온 상태였다. 송 의원이 해결한 이 사업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갈등해결 최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행정공무원으로서 해온 것들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갈등과제 해결입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갈등과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많아요. 시화호 주변 지역의 북측 간석지를 개발하는 업무를 하는데 환경단체가 계속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합의사항조차도 이행이 안됐는데 끝장토론도 하고 무제한 샅바싸움도 해서 결국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지금 시화멀티테크노밸리(MTV)가 성공적으로 개발돼 그 재원으로 지역의 환경사업도 하고 서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송석준 의원과의 인터뷰 ②편 계속됩니다.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국회뉴스ON 이상미 기자 smsan@assembly.go.kr